
동네 주민들과 소박하게 시작해보려던 계획
작년 가을쯤이었을 거다. 아파트 단지 내 도서실에서 이웃들과 작은 독서 모임을 정기적으로 해보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마침 동네 주민센터 게시판에 ‘마을공동체 활성화 지원사업’이라는 공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활동비와 재료비 명목으로 최대 300만 원까지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리 돈 안 들이고 책도 사고 간식도 먹으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사비로 각자 몇만 원씩 걷어서 운영하는 것보다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 훨씬 풍족하게 모임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청서 양식을 다운로드해 한 장짜리 사업계획서를 대충 채워 넣을 때만 해도 앞으로 닥칠 번거로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회원 가입부터 막히기 시작한 보조금 관리 시스템
선정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기뻤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보조금을 교부받고 집행하려면 ‘e나라도움’이라는 국가보조금 통합관리시스템을 이용해야 했다. 인터넷 뱅킹처럼 로그인해서 송금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회원가입 단계부터 난관이었다. 단체 명의의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아야 했고, 범용 인증서 비용으로 몇만 원이 불필요하게 지출되었다. 게다가 크롬 브라우저에서는 자꾸 오류가 나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드로 전환해가며 겨우 접속했다. 시스템 화면은 온통 낯선 행정 용어로 가득 차 있었고, 예산을 등록하는 메뉴 하나를 찾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냥 내 계좌로 돈을 쏴주는 것이 아니라, 보조금 전용 카드를 만들어서 정해진 비목으로만 결제해야 하는 복잡한 구조였다. 첫 단추를 끼우는 순간부터 그냥 우리 돈 내고 편하게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구청 담당자와의 끝없는 영수증 씨름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곳은 구청 3층의 자치행정과 사무실이었다. 서류 심사를 통과했음에도 예산 계획서의 세부 항목이 맞지 않는다며 보완 요구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예를 들어 다과비로 책정된 금액에서 빵과 커피는 되지만 샌드위치는 식비로 분류되어 집행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한 번은 독서 모임 후 주민들과 인근 카페에서 4만 5천 원을 결제했는데, 영수증에 상세 품목이 나오지 않아 카드 매출전표와 간이 영수증을 이중으로 제출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담당 공무원은 규정상 어쩔 수 없다고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직장 근무 시간에 그런 전화를 받고 서류를 팩스로 다시 보내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서류 보완 요청을 받고 이를 수정해서 재승인을 받기까지 보통 2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좋은 취지보다 서류 증빙이 우선시되는 현장
가장 미안하고 멋쩍었던 순간은 주민 모임 현장에서 발생했다. 지원금으로 간식을 사거나 외부 강사를 초청할 때마다 매번 증빙용 단체 사진을 찍어야 했다. 연세가 지긋하신 동네 어르신들은 빵 하나 먹는데 왜 매번 카메라 앞에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하느냐며 머쓱해하셨다. 강사료를 지급할 때도 강사의 주민등록등본, 통장 사본, 개인정보 동의서와 서명이 들어간 자문 확인서까지 받아야 했다. 5만 원 남짓한 강의료를 주면서 이런 개인정보까지 요구하려니 부탁하는 입장에서도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주민들이 모여서 나누는 따뜻한 대화와 교류보다, 나중에 구청에 제출할 서류에 들어갈 ‘참석자 서명부’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한 주객전도가 매주 반복되었다.
지원금을 다 쓰고도 개운하지 않은 이유
모임 기간이 끝나고 마지막 정산 보고서를 올리는 과정은 그야말로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부가가치세 10원 단위가 맞지 않아 시스템 등록이 반려되었을 때는 노트북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결국 구청 담당자와 전화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 씨름한 끝에 수수료 처리 방식을 변경하여 해결하긴 했다. 어찌저찌 300만 원의 보조금 집행을 모두 마쳤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이웃들과 보낸 즐거운 시간보다 엑셀 파일과 영수증 풀칠의 기억뿐이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신청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차라리 1인당 몇만 원씩 각출해서 조용히 모임을 갖는 쪽을 택할 것 같다. 공짜 돈을 쓰는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고, 아직도 서류철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예산 때문에 샌드위치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복잡해질 줄은 몰랐네요. 팩스 전송하는 시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아요.